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 정보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단상]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게 된 것은 대학교 시절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서였다. ‘상실의 시대’ 보다 더 먼저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단번에 favorite book No. 1에 올랐다.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소설이지만 책을 읽으며 오히려 마음의 안정, 위로를 많이 얻었기 때문이다.

그 후 무라카미 하루키는 영감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설가라는 인식이 깊게 남아 있었는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적지 않은 충격을 느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졌을 것이라고’ 느낀 영감과, 재능을 위해 하루키는 매일 같이 읽고, 쓰고, 체력을 기르기위해 담배를 끊고, 매일 달려왔던 것이다. 이제보니 하루키는 전형적인 ‘Grit’의 대표인물이었다.

달리기를 통해 자신을 가다듬고 성장시켜 나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며 언젠가 나도 저렇게 잘 달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의 재능이 아닌 노력과 삶의 태도에서 배운다.

[발췌]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계속 하는 것-리듬을 단절 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 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달리는 것은, 내가 이제까지의 인생을 사는 가운데 후천적으로 익혔던 몇 가지 습관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익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된다. … 물론 나라고 해서 지는 걸 좋아할 리는 없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경기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한결같이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한 성향은 어른이 된 뒤에도 대체로 변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런 의미에서 장거리를 달리는 것은 나의 성격에 아주 잘 맞는 스포츠였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달리고 나서 자신에 대한 자부심(혹은 프라이드와 비슷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장거리 러너에게 있어서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유익한 운동인 동시에 유효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나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와 같은 괴로움이나 상처는 인생에 있어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이다, 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타인과 얼마간이나마 차이가 있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자아란 것을 형성하게 되고, 자립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마음이 받게 되는 아픈 상처는 그와 같은 인간의 자립성이 세계에 대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당연한 대가인것이다.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과 단절은 병에서 새어 나온 신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그 내벽을 끊임없이 자잘하게 상처 내기도 한다. …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직감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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