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공터에서

몸속을 덮은 안개 속에서 해독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수런거리면서 이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발생하지 못한 세포들이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우주공간을 날아가는 별들의 소리 같기도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고, 말하고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지지 않은 소리였다.

당대의 현실에서 발 붙일 수 없었던 내 선대 인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그들의 기록, 언행일치, 몸짓, 그들이 담긴 사진을 떠올리면서 겨우 글을 이어나갔다. 이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그 기억과 인상들이 이제는 내 속에서 소멸 하기를 바란다.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을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 때 마차세는 결혼이 그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생활을 구성하는 온갖 작고 하찮은 것들이 쌓여서, 그것들이 서로 인연을 이루고 질감을 빚어내서 마차세의 시간을 메워주기를 바랐다.

박상희는 아이들이 종이나 캔버스에 선을 긋고 물감을 칠할 때 그 종이나 캔버스를 빈 공간이 아니라, 이 세상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으나 그 바람 또한 이해받기는 어려웠다.

이도순의 기억상실은 잊혀지지 않는 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잊고 싶은 것들만을 되살려내는 기억 회생의 병증인 것처럼 보였다.

단상
읽을수록 몰입되는 소설이다. 구조도 참신하고 흥미롭다. 초반에 전체적인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이 한 틀로 보이고 뒤로 가면서 인물, 시간, 사건이 각각 면밀하게 관찰되어진다.
하나의 큰 이야기로만 읽혔던 것이 그들의 상황, 입장, 생각을 토대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이야기 속으로 더욱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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