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격 (필사)

삶의 격 필사

존엄성이란 아주 중요한 것, 절대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모두들 알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무얼 말하는 것인가? 명쾌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의 특성으로 존엄성을 규정짓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 특성의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존엄성을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특성으로 보지 않고 어떤 특별한 성질, 즉 권리라는 성질을 지닌 인간의 특성으로 보게 된다. 이 권리는 특정한 식으로 간주되고 대접받을 권리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고 타인이 그에게 그 어떤 끔찍한 짓을 하더라도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권리로 이해된다. 이 권리를 조물주로서의 신과 인간관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은 다른 접근법이다. 이 책에서 내가 말하는 존엄이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특정한 방법이다. 그것은 사고와 경험, 행위의 틀이다. 이러한 존엄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틀의 개념을 행동으로 나타내고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 꼭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매번 이해하고 인과관계에 관해 스스로 물어보는 것이다. 존엄성에 대한 경험에 담긴 직관적 내용을 끝까지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이 세 가지 물음, 세 가지 경험의 종류, 세 가지 분석의 차원은 모두 존엄성이라는 개념으로 흘러 모인다. 이 세가지가 한곳에 모여야 개념을 이루는 밀도가 더욱 조밀해지며 무게감을 지니게 된다.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삶에서 우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기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종종 비유법의 도움을 빌렸다. 그것은 균형이라는 은유다.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센 중력장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쓸 때처럼 무척 힘들게 느껴진다. 존엄성을 잃기도 하고 다시 찾기도 하는 것은 이를테면 균형을 잃었다가 다시 잡았다가 하는 것과도 같다.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존엄의 상실은 중심을 잃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특별한 균형이 존엄성인 것이다. 이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존엄성이 없으면 우리는 어떤 일을 경험하고 나서 그 경험의 고갱이를 머릿속에 고착시킬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게 된다. 마치 사고의 시야에 허연 얼룩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도 같다.

존엄성 있는 생활 방식은 매끈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금이 갈 수도 있고 이가 빠질 수도 있고 울퉁불퉁하거나 다른 것이 섞여 들어갈 수도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불완전함을 덮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한마디로 간추릴 수 없는 성질의 논리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삶의 격’이라는 책의 서문 필사이다.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피아노 조율사’, ‘리스본 야간열차’ 등을 집필한 Peter Bieri 작품이다. 처음 책 제목을 들었을 때는 재밌는 소설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첫 장을 읽으니 생각보다 딱딱한 문체였다. 두 번째 장에 들어서자 ‘바로 내가 찾던 책이였네!’하는 반가움에 설레임이 일렁였다.

아직 초반부를 읽는 중이지만 서문만 읽어봐도 글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삶의 형태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하는 것, 불완전한 존엄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그 경험과 결과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평소에 궁금했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 어떻게 질문할지 조차 어려웠던 의문들을 이 책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새로운 생각과 고민이 많은 시기인데다가, 나 자신을 돌아볼 일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솔직하고, 속 시원하게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 천천히 곱씹고, 음미하며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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