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필사 (3)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 (손석희 앵커브리핑)


필사 정보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

작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한번 씩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죠.
눈앞에 펼쳐진 백지 위에 짧게는 스무 해 혹은 서른 해 가까이 차곡차곡 나름대로 쌓아온 스펙과 인생을 정리해 내보이는 작업입니다.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 오은 <이력서>

젊은 시인의 말처럼, 그 얇은 백지 안에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추리고 추린 한 장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본디 제품의 사용설명서라는 의미를 줄여 만든 ‘스펙’이라는 그 단어처럼 세상이 원하는 규격화된 기준을 채워야 함은 물론이고… 자신이 타인보다 많은 역경을 극복해왔으며 타인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내보여야 하는 치열한 백지 한 장의 경쟁.

그 두터운 중압감을 무거운 마음을 세상은 헤아리고나 있는 것일까…

오늘 발표된 공공기관 채용비리 최종조사결과는 사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이력이 아니라 가족과 지인의 이력을 통해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 비집고 들어간 사람들의 사례는 이미 세상에 넘쳐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저희 JTBC 보도에 따르면 부정이 적발된 이후에도 “이미 합격한 사람을 어찌할 것이냐”는 논리에 따라 그동안 관련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하니…

얇은 백지 한 장.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그 한 장을 채워내려 했던 젊음들은 무엇이 정의로운 법칙인가를 세상에 묻고 있었습니다.

이력서 쓰기가 특기가 된 이력 위로
그나마의 스펙은 스팸으로 쌓이고,
눈 붉은 불면의 밤은 무겁고도 더디다

  • 서숙희 <원룸시대>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인 2015년의 겨울에 앵커브리핑에서 인용했던 문구를 다시 꺼내듭니다.
세 번의 해가 지나간 오늘.
잠 못 이루던 그 젊은이는 갈 곳을 찾았을까…

아니면 오늘밤도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
자기소개서를 앞에 두고 눈 붉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까…


[단상]
이른 아침 깨어 기침을 해가며 출근 준비를 하는 남편, 채 뜨지 못한 눈을 비벼가며 아빠에게 안겨 등원하는 아들을 보며 뭉클한 마음이 든다. 모두들 그렇듯 살기 위해, 벌기 위해 정신없는 하루하루.

하지만 그 어떠한 문학보다도…
생계를 위한 노동은 숭고하고 아름답다.
모든 워킹파파, 워킹맘, 전업주부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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